설송 큰스님 관세음보살보문품 주요 어록
불교(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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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에게 불교(佛敎)가 뭐냐고 물으면 “부처님 믿는 거요"한다. 또 부처님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석가모니요"한다. 그런데 그 불교라는 말이 얼마나 크고 좋은 뜻인지 모른다.
불(佛)이란, 우주가 모든 만물을 살리는 그 힘을 말한다. 그걸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아 있는 힘 속에서 내가 배우고 사는 모든 것을 일러서 불교 (佛敎)라고 한다.
하다못해 밭에서 배추를 길러서 뜯어다 먹고 사는 모습까지도 불교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는 데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배우고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모습 전체가 바로 불교인 것이다.
불교가 그렇게 좋은 말인데 우상을 섬긴다는 소리를 듣게 했으니, 우리 스님들이 나 불자들의 잘못이 참 크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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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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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불렀는데, 무슨 뜻으로 그것을 부르나?
나무(南無)란, 남(南)쪽은 불을 상징한 것이다. 불은 항상 꺼져 있고 없는 것 같지만 우리가 노력해서 서로 강하게 마주치면 불이 나온다. 그래서 나무(南無)는 “저희에게 지혜를 주십시오"하는 뜻이다. “저희가 지금 지혜가 어두워서 힘이 듭니다. 밝은 지혜를 주십시오.”한다.
묘(妙) 자(字)는 “저희가 기다리는 힘이 부족하니, 해와 달과 별의 힘을 내려주십 시오"하는 염원이다. “해, 달. 별은 언제든지 힘들어도 참고 있으니 그 힘을 저희 에게도 주셔서 참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한다.
법(法)이다. 물은 세 번을 변해서 모든 중생을 살리는데, 우리는 세 번을 참지 못한다. 말을 하더라도 세 번 참고 해야 되고, 모든 것을 세 번 참는 데서 바로 흙과 같은 후한 모습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부처님께 그 염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連)이란, “모든 사람을 한 수레에 싣고, 그 사람들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하는 뜻이다. 화(華) 자(字)는 12획이다. 1년도 열 두 달이 되면 다시 봄이 온다. 그래서 “봄에 싹이 나듯 우리가 새로운 싹을 낼 수 있는 여건을 주십시오”하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경(經)을 부른 것은 “이것이 끊어지지 않고 늘 연결되어 내려가게 해주십시오. 그런 믿음이 늘 내려가게 해 주십시오” 하는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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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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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열반하셔서 아무것도 없으신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놓으셨 나? 바로 경(經)을 남기셨다.
당신이 몸소 행하시고 깨달으신 전체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다. 그래서 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이다.
경을 열심히 일고 정성스럽게 모시는 일은 부처님의 몸을 모시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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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어떻게 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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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경(經)을 읽고 누진이 다 떨어져서 자기한테 아무것도 없으면, 그때는 부처님을 뵐 수 있다. 부처님을 어떻게 뵙나?
‘내가 제일 잘하고 나만 훌륭한 줄 알았더니,아니다. 남들이 훌륭하다. 나를 힘들게 해서 깨우치게 만들어준 저 사람들이 정말 훌륭하다‘ 하고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을 뵌 것이다.
누가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군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더라. 부처님을 뵈었다고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금빛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본 것으로 알지만, 그게 아니다. 나한테 고통을 준 그것이 바로 나를 옳은 길로 끌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 때 그때 여러분은 부처님을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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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뇩다라삼먁삼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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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 만물은 전체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속에 있다. 들판에서 자라는 곡식도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다. 비바람에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고, 자라나는 풀들을 보면 세수를 하지 않아도 그 모습이 항상 깨끗하다. 비를 통해서 바람을 통해서 제 몸을 닦고 있다.
강아지들도 전부 자기 몸을 닦을 줄 안다. 가려운 데 긁을 줄 알고, 똥도 나가서 눌줄 알고, 다 깨끗하게 다닌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가꾸는 모습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 까지도 때를 묻히고 다니는 법이 없고, 새도 비를 맞으면 빗물이 몸에 안 들어가게 다 털어내 버릴 줄 알지 않는가?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우리 마음은 어떤 걸 통해서 깨끗하게 닦고 있나?
우리한테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생길 때 그것을 말하지 않고 참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돼서 마음의 때가 다 벗겨지게 된다. 그러나 힘들다고 꾀쓰고, 또 좋다고 헤헤거리고, 싫다고 미워하고 이렇게 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때가 끼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나갈 때는 마음의 때가 벗겨지지만, 참지 못하면 자꾸 때가 끼어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 내 몸에 하도 이가 많길래 주무시는 스승님께 몰래 옮겨놓기도 하고 이가 득실거리는 옷을 덮어드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스승님 몸에는 이가 올라가질 않았다. 그때 스승님이 “이놈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이도 다 도망가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면 너한테 이가 낄 수 밖에 없다. 너 있는 자리가 극락이야. 마음속의 그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이도 없어진다"하셨다. 그 말씀 한마디가 그렇게 귀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갈 수 있나? 그러면 마음의 때가 벗겨지고 거울같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지혜를 얻게 된다.
어떤 괴로움이 오더라도 그것이 바로 나의 극락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물러가는데,나한테 이롭지 못한 것이라고 배척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나한테 싫은 것도 내것이다. 내가 당할 고생이니까 원망하지 않고 참아내면 어느덧 마음에 안정이 오게 된다.
산에 있는 어느 소나무인들 바윗돌 틈에서 나오고 싶겠는가?
그런데 바윗돌 사이에 힘들게 뿌리를 내려서 키도 잘 자라지 못하는 그 소나무에 서는 관솔이 나와서 사람들의 눈을 밝혀준다. 마찬가지로 우리 처지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관솔과 같은 위치에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처지를 원망해서 스스로 닦는 길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하라.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이루른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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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阿彌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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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阿彌陀)가 무엇인가? 아미타불이다, 나무아미타불이 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하는데, 이 우주 만물을 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에 아미타(阿彌陀佛)이라고 한다.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이든 짐승이든, 하다못해 곤충까지도 다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가 아미타불로 가고 싶다고 하고,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갈 때 그 모습은 활처럼 둥글게 굽어 있다. 그 둥근 데서 힘이 생겨서 우주를 다 살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미타의 모습이다. 활같이 구부러져 있는 그 힘에 우주가 돌아가고 모든 만물이 살아간다.
아미타의 그 모습이 온 우주를 움직이듯이, 우리 인간도 구부리고 겸손하면 세상 사람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될 대 도(道)도 트이는 것이다.
30년을 면벽 수도한 어느 스님을 황진이가 찾아갔는데, 결국은 그 스님이 유혹에 넘어가서 공부가 무너졌다. 그런데 서화담한테 가니까 방 내주려고 자라고 해도 아무 일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서화담은 겸손하게 구부렸다. 언제든 내가 잘났다고 머리를 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속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범치 못한다. 제일 무서운게 겸손이다. 겸손한 사람은 속일 수도 없고 속지도 않으니, 그것이 바로 아미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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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장(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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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데는 ‘나의 이 열 손가락이 다 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축원이 담겨 있다. ‘이 손이 놀고 있습니다. 이 손이 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뜻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고,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지으면서 두 손을 놀리지 않고 노력할 때 이 우주의 힘이 우리한테 오게 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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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念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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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갈 때는 일심으로 염불(念佛)을 하라는 말씀이 있다.
음기(陰氣)가 성한 곳엘 가더라도, 우리가 그곳에 들어갈 때 염불을 하면 음기가 덤비지 못한다. 산에 다니다가 서낭당 같은 데를 모르고 그냥 쑥 들어가면 거기에 있던 음기에 당하기 쉽다. 그러나 염불하고 들어가면 그런 일이 없다.
옛날에 원효스님은 전염병 든 마을에 들어갔어도 병이 옮지 않았다. 염불했기 때문이다. 그럼 원효스님은 무슨 염불을 했나?
오로지 불쌍한 중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마음이 늘 그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음기가 범치 못했다. 남이 불쌍한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진정으로 가서 딱하게 생각할 때는 병마(病魔)도 물러가고, 그 어떤 음기도 덤비지 못한다.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 그것이 바로 염불(念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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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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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선(禪)을 한다고 하고, 선(禪)이 가장 좋다고 얘기한다. 물론 선(禪)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선(禪)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행(行)이 어떻게 되는지를 돌아보라.행(行)을 바르게 하지 않고 선(禪)만 하고 앉아 있으면 화두(話頭)가 나오질 않는다.
선(禪)이란 나 혼자 아는 것이다. 그래서 볼 시(示) 변에다 홀 단(單)을 했다. 나 혼자만 알지 누구도 모르게 선(禪)인데, 그 아무도 모르는 힘을 자기가 노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추어줄 때 공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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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을 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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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을 읽거나 법문을 들으면 변화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고행하시고 나서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어 나오셨는데, 부처님이 그때 하신 말씀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지금도 깊이 들어가서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하신 것을 인용할 때는 그 힘이 똑같 이 움직여진다. 우리가 “아무개야"하면 바로 대답이 오듯이, 이 경도 꼭 응답이 오게 돼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우주의 모든 힘을 한데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이 경을 풀고 그대로만 얘기하면 상대방에게 틀림없이 변화가 가게 된다. 우리가 땅을 파면 물이 나오게 돼 있듯이, 그 변화가 안오는 법이 없는 것이다.
경을 가지고 그대로 풀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때 하신 말씀과 똑같아서 모든 신중들이 다 들어주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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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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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드릴 때 조용히 앉아서 부처님께 염원을 하는 것은 내 마음과 우주의 마음이 한데 합해지라는 뜻이다. 내 마음이 우주의 마음과 합해지고 부처님 마음과 합해지면 그 힘은 강해진다. 그 강해진 힘으로서 만중원적(滿中怨賊)의 세상을 이겨 나가기 위한 것이다.
살다 보면 모두가 적이다. 물도 먹을 땐 좋지만, 홍수가 나면 적이 되고, 추위도 적이고 더위도 적이다. 우리한테 전부 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조용히 앉아서 기도할 때 내 마음이 텅 비면서 우주의 힘과 내 힘이 같아지면 유불여불(唯佛與佛)이 된다. 내가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이 내가 될 때 그 힘이 강해져서 이 세상의 어떤 고통도 이겨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힘만 생기면 세상 일은 어려울 게 없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면 청하지 않은 객이 들어온다. 옛날에 죽 쑤어 먹던 생각, 빌려준 돈을 받을 생각, 쓸데 없는 생각들이 막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외래보살(外來菩薩)인데, 그것만 막으면 내 마음이 비워지면서 우주의 강한 힘과 연결되어 서 세상을 다 이기게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못 막는다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바로 그런 데 있다. 뭘 벌어서 얻는 법은 없다. 내 힘으로 얻어 가지고 내가 살아야지, 빌어서 얻은 것은 무엇에다 쓰나? 우리 불법(佛法)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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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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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피란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내가 노력할 때 붙는 힘인 것이다. 열심히 뛰다 보면 점점 가속도가 붙듯이,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그런 가피력이 오게 돼 있다.
만약 입으로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실지 행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루어 지기 어렵다. 말이나 모든 것을 다 잘하지만 끝에 가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죽으면 영가 천도하기도 아주 힘들다.
그러니까 가피라는 것도 내 노력의 가피지, 노력이 없는 곳에 가피가 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한 자리만 찾는 사람은 가피를 입기가 힘들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가피를 받지 말라고 해도 가피가 벌써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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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妙法)으로 하는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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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법문할 때마다 새로운 얘기를 꺼내냐고 묻는다. 그 전에 풀던 대로 풀어주지 않고 왜 상상도 못했던 것을 또 꺼집어내느냐고 한다.
그런데 늘 하던 대로 똑같이 하는 법문은 묘법(妙法)이 아니다. 새로운 법문이 들어가면서 새로운 생각이 나와야 된다.
우리 인간은 매일매일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나간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매일매일 새로운 것, 그것이 바로 묘법인 것이다.
법문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게 나오고, 또 새로운 게 나오고 그래야 묘법이 된다. 늘 새로운 법문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생각 또한 새로워지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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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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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끝끝내 참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부처님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여러분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실 것이다. 그 고통을 다 참고 견뎌서 성불(成佛)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 두고두고 채찍 맞지 말고, 아예 지금 이 순간 참아라. 누가 미워해도 참고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웃고 나가면 반드시 거기에서 힘이 나온다. 그럼 당대(當代)에 작불(作佛)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바로 오늘이라도 작불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이런 염원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제 것이 아니고 우주 부처님 것입니다. 저에게 다만 참고 견딜 수 있는 힘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주시는 그 어떤 채찍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부처님을 믿는 길이요, 부처님을 따르는 길이요, 경(經)속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어 거기에서 나오는 자비(慈悲)와 사람의 힘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도록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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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에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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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말은 연꽃에 비유해서 얘기한 것이다.
우리 인생 자체가 연(蓮)과 같다. 연꽃이 한번은 꽃이 피었다. 한 번은 열매를 맺고,
그러는 동안 연뿌리가 굵어진다.
이 우주도 그렇게 해서 씨앗이 여물게 되는 것이다. 가을이 되어 연꽃이 다 진 다음에 물 속에 있다 다시 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세상도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여기 와서 열심히 살다 가면 다 끝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갔다가 또 와서 자라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산다. 이것이 연화(蓮華)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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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放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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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보니 몰꼬가 말라 올챙이가 죽게 생겼다. 그게 너무 불쌍해서 물을 갖다 넣어줬는데, 그 올챙이를 살려준 공으로 부처님의 상당한 가피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방생(放生)이다.
방생이란, 불쌍한 것을 보고 자비(慈悲)의 마음이 움직여서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에서 잘 놀고 있는 고기를 잡아다 통에다 가둬서 한참 동안 고생시키고, 또 그것을 다시 물에다 놔 주는 것은 지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소원을 빌기 위해서 물고기를 혹사시키는 것인데, 그게 참다운 의미의 방생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돈으로 이웃의 어려운 사람이라도 도와준다면 차라리 그것이 방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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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磨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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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마음으로 보지 않고 눈으로 본다.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입으로 얘기하려고 한다. 그래서 화성유품(化城喩品) 애서 맹명무도사(盲冥無導師)라고 하신 것이다. 눈은 어둡고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우리의 눈은 천 리 앞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 천지를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을 닦으라고 한다.
마음이란, 갈 마(摩) 자(字), 그늘 음(陰) 자(字) 마음(摩陰)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음(陰)에서 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또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음이다. 그러나 우주의 태양이 그 음을 치는 바람에 고민도 생기고 일도 생기고 노력도 생긴다. 우주의 만 중원적(滿中怨賊)이 때리는 데서부터 우리의 마음이 닦여지면, 모든 것이 마음의 눈에 띄게 되고 살 수 있는 길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햇빛보다 더 밝고 등불보다 더 밝고 달빛보다 더 밝은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摩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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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한번 돌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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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는 365도 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 속의 피도 365로 돌고있다. 그 도는 데서 우리 몸의 건강이 유지된다.
이 우주도 돌아야 되고,피도 돌아야 되고, 또한 우리 마음도 돌아야 된다. 우주가 돌아가는 그 속에 살면서도 우리 인간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돌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체하고 옹치는 것이다. 자기 마음 한 번 돌리면 건강이 올 텐데, 마음을 돌릴 줄 모르니까 우주의 이치를 거스리게 된다.
모든 고통은 이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데서부터 온다. 그것을 돌릴 때 하늘에 순종하는 것인데, 왜 마음을 못 돌리나?마음 한 번 돌리면 살인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가 도는 데서 햇빛과 달빛과 별빛이 나오고, 거기서 모든 공기가 살아나게 되듯이, 우리 인간도 이 마음 한 번 돌리는 데서 모든 일거리가 생겨 나오고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성공할 수 있는 원리가 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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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뜻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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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뜻과 생각이 막히면 우리가 고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막힌 것이 뚫리질 않는다. 마음은 있어도 나하고 하나로 연결되지 않으면 막힐 것이고, 뜻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막힐 것이다. 또한 생각이 아무리 많더라도 뚫려야 적중이 되지 뚫리지 않으면 거기 또 막혀서 고생하는 것이다.
그 세 가지에 다 막혀서 힘이 드는데, 그것을 뚫고 나가려고 자꾸 애를 쓰다 보면 나중에는 다 뚫어진다. 뚫어지면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문이 열리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뜻을 이루면 입신양명할 수 있고 또 생각이 열리면 모든 집안을 제대로 관리하고 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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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면 무서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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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송장을 방에다 놔두고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 송장은 사람이 죽은 것이지, 송장이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그것을 볼 때는 아무런 마음도 안 생긴다. 그런데 만약 송장을 보고 공연히 무섭고, 부모나 이웃이더라도 괜히 그 송장이 두려운 마음으로 쳐다보이고 이러면 그 송장이 움직인다.
죽은 사람에게는 양기(陽氣)는 떠나고 음기(陰氣)만 있고, 산 사람에게는 음양(陰陽)이 같이 있다. 그런데 무섭다는 마음 때문에 나한테서 음(陰)이 강해지고 양(陽)은 죽어 들어가니까 그 죽은 송장이 내 양기(陽氣)를 반반씩 나누어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 송장한테 양기가 들어가는 바람에 움직이는 것인데, 잘못하면 송장이 일어나 앉기도 하고 쫓아오기도 한다. 이것이 모두 자기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니까 음기가 붙어서 그런 것이다. 무섭다는 마음이 없으면 음기가 붙을 이유가 없다.
신(神)들도 마찬가지다. 음기가 자기한테 올 때 그것을 받아 들이니까 그렇지, 받아 들이지 않으면 그런 게 왜 들어오나? 사람들이 귀신이 무섭다 별 소리를 다 하는데, 귀신이 무서울 게 뭐가 있냐 말이다. 공동묘지에 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귀신이 묘지를 뚫고 나와서 사람을 죽이는 법은 없다.
왜 무섭나? 무섭다고 하니까 무섭지, 아무것도 무서울 이유가 없다. 내가 인간인데 귀신이 나한테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그런데 뭐가 있다는 악습과 잡념이 끼여서 괜히 신(神)들을 겁내고 이런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사람인데, 신들이 뭘 어찌 하겠는가? 내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무서운 생각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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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한데 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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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시켜놓고 나무 해다 불을 때주고 밭도 매주고 참깨도 심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 하는 일마다 전부 선(禪)이 들어가더라. 풀 뽑는 속에도 선이 있고, 나무 하는 데도 선이 있고, 걸어가는 데도 선이 있고, 앉아는 데도 선이 있었다.
풀을 깎더라도 거기에 마음이 전념해서 들어가면 번뇌, 망상은 없어진다. 그런데 풀 깎으면서 다른 생각하면 손가락 벨 일 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마음이 모아지면 실상(實相)이 우리 마음과 같이 움직이면서 그것이 바로 보탑(寶塔)이 된다. 사리(舍利)와 같은 그런 문제로 바뀐다. 그래서 그 사리(舍利)의 향기가 날 때 비로소 도(道)를 깨달았다 하는 것이다.
기도하러 와서 마당에 풀이라도 하나 뽑고, 법당이라도 쓸고 닦고 이런 사람들은,누가 그 옆에서 기도를 하면 그 사람 기도까지 이루어진다. 그러나 깨끗하게 옷 입고 도량에서 주는 밥이나 먹고 돈 몇 푼 내고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자기의 공은 이루어질지 몰라도 남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인생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데서부터 향기가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우선 자기 육신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열심히 노력할 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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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미워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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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그 사람도 나를 미워한다. 나는 상대를 미워해도 그 사람은 나를 안 미워하는 줄 아는데, 서로 똑같은 것이다.
만약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미워하면, 그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더 미워하게 돼 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맞닥뜨릴 때는 어떤 변화가 오나?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움은 음(陰)이다.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면 음(陰)과 음(陰)이 마주치는데, 바로 그럴 때 영가들이 움직이게 된다. 예를 들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미워하면, 저 위에 영가들이 내려다보고 있다가 “너 그러면 안 된다"하고 야단친다는 것이 그만 그 사람의 호흡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그럴 때 잘못하면 병도 생길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미운 마음을 먹는 데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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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마음은 가지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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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운 놈 하나를 제거하면 그런 사람이 또 나온다. 속썩이는 사람이 생겨서 그를 미워하면 그런 사람이 점점 더 생긴다. 마(魔)가 가지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속을 썩이고 해도 “그래"하고 참고 견디고 잘 보호해 주면 더 가지를 치지 못한다. 만약 상대가 밉다고 내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몇 배가 더 나오게 된다.
여러분들은 누가 미우면 “요놈의 자식!”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절대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마(魔)가 새끼를 못치고 항마(降魔)를 해온다. 이것이 아주 큰 비밀이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그것이 자꾸 퍼져나간다. 끝나는 법이 없이 자꾸 연결이 돼서 나간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면 또 연결되고 또 연결돼서 참 귀찮은 것이다. 여러분들이 나와 호흡을 맞추려면 미운 사람이 있어도 절대 용서하라. 여러분을 괴롭히고 미워하는 그 사람이 진짜 스승인 것이다. 그 항마를 못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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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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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왜 성을 낼까?
이 세상에 만들어질 때 사람에게 눈을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보라고 만들어준 것이 다. 그래서 모든 것이 참되게 보여야 되는데, 자기가 바로 보지 않았다.
마음에 욕심이 끼어 있으면 바로 보이질 않는다. 욕심을 버릴 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인다. 성을 내는 것은 자기 욕심 때문에 잘못 보았다는 것이다. 자기 눈에 바로 보이면 성낼 리가 없는데 바로 보이지 않은 것이다. 욕심이 눈을 가려서 안 보이니 까 성을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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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一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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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성을 들인다. 기도한다 하는 것은 일심(一心)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는 늘 이럴까 저럴까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갈등이 움직이는데, 그것을 다 모아서 한 마음으로 딱 묶는 것이다.
일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장엄법(莊嚴法)인데, 사람이 분별을 너무 많아 하면 밝아지지 않는다. 또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이 생각을 했다가 저 생각을 했다가 자꾸 생각이 많아지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이다.
절구질 하나를 하더라도 절구에만 마음을 두고 벼를 찧으니까 그 놈이 벗겨지지,이 생각 저 생각 하면 절구에 있는 것이 다 튀어나간다. 무슨 일이든 일심에 들어가 서 움직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육취(六趣)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참 힘들지만, 일심(一心)만 될 수 있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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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慈悲)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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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하고 길을 지나가는데, 큰 구렁이가 나무에 올라가 까치 새끼를 꺼내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스승님께서 목탁을 치시면서 염불을 하니까 구렁이가 차츰차츰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알이 되었다. 스승님은 그 알을 목탁 채로 때려 없애 버리셨다.
그것을 보고 얼마나 신기했던지, 나는 그게 큰 법인 줄 알고 그날부터 매일 구렁이를 찾아다니느라 애를 썼다. 큰 구렁이만 보면 목탁을 두들기고 염불해 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봐도 구렁이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속으로 ‘나 같은 인간이 무슨 도(道)를 닦겠다고 그러나? 남이 해서 되는 것도 나는 안 되니 나는 글렀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는 동네 어귀의 나무 및에 드러누워서 보니까, 까치가 버드나무에 집을 지었는데 구렁이란 놈이 까치 새끼를 꺼내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까치는 죽는다고 깍깍거리는데 그게 나한테 “도와주십시오!”하는 소리였다. 그걸 가만히 보면서 ‘까치는 무엇이고 너는 뭔데 그걸 꼭 잡아 먹어야만 되겠느냐?’ 생각을 했다.
살려달라고 울어대는 까치가 불쌍해서 속으로 나도 모르게 염불이 나오는데, 그 순간 구렁이가 올라가다 말고 나무에 딱 붙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그리고 크기가 차츰차츰 줄어들더니 알로 변해 들어갔다. 그때 그걸 보고서여 비로소 ‘ 아 이것이 바로 자비(慈悲)에 있었구나. 그것을 모르고 내가 쓸데없이 그 조화만 배우려고 했구나!”하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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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精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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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精誠)이란, 죽었던 마음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잊고 있던 것이 살아나서 칠보가 이루어지는 모습니다. 마음을 모아서 정성을 들으면 공간에 있는 입자들이 호흡을 통해서 살아 들어온다. 그래서 내 마음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이다. 죽어 있던 우리의 정신에 공간의 산 입자들이 들어오면, ‘이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고 바른 생각이 난다.
자식이 아플 때 부모가 정성을 들이는 것도 그런 이치가 있다. 정성의 힘을 통해서 입자의 변화가 움직일 때 그 자식한테 맞는 약을 구해서 쓸 수 있게 되고, 또 자신도 모르게 어떤 혈맥을 눌러서 건강을 되찾게 해주기도 한다. 정성을 들이는 데서 부터 많은 변화들이 나온다.
그렇다고 수명이 다 된 사람에게 정성을 들인다고 해서 살아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게 되더라도 ‘내가 어디로 가야겠다‘ 하고 깨닫게 해서 자기 갈 길을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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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맛은 단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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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항상 부처님에게 염(念)을 하는데 “복을 좀 주십시오“ 이러고 엎드리지 말고 “부처님이 우리 중생을 위해서 얼마나 큰 난행고행을 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염할 때 기도가 이루어진다.
자기한테 고통이 올 때도 “부처님 감사합니다. 저도 인간이라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것을 견디고 또 견뎌서 부처님 은혜의 천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하고 감사한 생각에 쑥 들어가보라. 그날부터는 아무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진다. 그 감사 하나로 다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백억화신이 돼서 나를 구제해 줄 것이다 '이러고, 또는 ‘내가 부처님을 믿는데 부처님이 날 버리시려고?’이러는데, 그건 자기부터 생각한 것이지 부처님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지 말고 부처님부터 먼저 생각해 보라는 얘기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해서 그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나는 이런 고통 하나도 참지 못하나?’ 이렇게 생각할 때 그때부터 변화가 오고 백억화신의 변화, 사리불의 변화가 오게 된다.
여러분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피하려 들고, 좋으면 달라붙는다. 그러나 그 달라붙는 맛은 반드시 쓴 맛이다. 오로지 고통의 맛이라야 단맛이 나는 것이다. 고(苦)란 본래 낙지복(樂之本)으로 모든 즐거움의 시초인데, 여러분들은 그게 조금만 들어와도 못 참는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생을 주시나?’ 아직도 내가 업보가 남았나?’ 이러면서 눈물 흘리고 속상해 한다.
그러나 고통이 오고 힘이 들거든 감사를 느껴라. ‘제개 이런 고통을 주실 때는 저를 부처님의 제자로 생각하시고 제가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해봐라 거기에 어떤 마(魔)가 들어올 것이며, 또 무슨 부처님에게 절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감사의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나한테 이런 말을 듣고 가도, 오늘 저녁에 당장 남편이 잘못하고 들어오면 못 참는다. 자기는 정성껏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술을 거나하게 먹고 와서 “나 오늘 한 잔 했어“ 그러면 “저녁은 먹었어요?”묻는다 “먹었어” “뭐 먹었어요?” “잘 먹었어“ 이러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내가 기다리는데 전화도 안 하고 그 밥이 잘 넘어가더냐? 네 놈이 그래 놓고도 집이라고 찾아와?” 속으로 그런 생각도 할 거다. 남편들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참아줘야 되는데 안 참는다. 여기서 먹은 마음 돌아서서 금방 변하지 말고 늘 참고 살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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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이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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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굴욕을 당할 때, 그 굴욕을 그대로 참고 넘어가야 큰 일을 할 수가 있다. 굴욕이야말로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그러나 바로 그것을 참고 나가게 되면 법(法)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자기에게 굴욕이 올 때는 ‘아, 내가 뭔가는 눈에 거슬리니까 저 양반이 그러는구나‘ 해야 된다. 그것을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가 뭔가 잘못한 게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들볶게 되는 것이다. 자기 양심에 비쳐서 자연 그렇게 된다.
어떤 굴욕이 오더라도 참으면 큰 일을 할 수 있고, 사람 가치를 하게 된다. 사람마다 굴육을 안 당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한테 굴욕,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한테 굴욕, 세상 사는 것이 전부 굴욕인데,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들볶는 모습니다.
그런 문제가 올 때는 ‘아! 맞다. 내가 뭔가는 잘못되어 있구나'하고 깨달아서 그걸 고치면 되는데, ‘굴욕이다. 참을 수 없다‘ 하고 보따리를 싸게 되면 나가서 다른 곳을 가봐도 또 다른 굴욕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굴욕을 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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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행고행(難行苦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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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행고행(難行苦行)은 행하기 어려운 것을 고(苦)로써 행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땀 흘려서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난행고행은 아니다.
난행고행이란, 자기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유혹을 참고 견디면서 자기의 본성을 그대로 지키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바로 항마(降魔)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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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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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만물이 다 나의 스승이고, 문수사리다.
저기에서부터 올 때 그 따의 힘에 의해서 풀의 모습, 나무의 모습, 개구리의 모습을 각각 가지고 와서 우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그래서 땅 위에 나 있는 모든 것이 다 스승인 것이다.
길가의 풀도 “나는 감기를 낫게 해주는 약초다“”나는 배 아픈 것을 고쳐주러 왔다“하고 가르쳐주니 우리의 스승이면, 방앗간에 걸린 방아 공이도 그것으로 벼를 찧어 먹으라고 알게 해주니 또한 스승이다.
사람도 그렇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다 나의 스승이다. 김을 잘 매는 사람도 스승이요. 못된 짓을 하는 사람도 스승이다. ‘저런 행동은 나쁘다. 나는 그러지 말자'하고 깨닫게 해주니 스승이다.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스승인데, 어느 누구인들 무시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무시하지 마라. 그것이 가장 나쁜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면 관세음이 우리를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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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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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산신(山神) 불공이나 신장(神將) 불공을 드린 적이 없다. 왜 인가? 만약 산신이 있다면 그건 우리 중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자기가 대접 받으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산신은, 산의 보물이나 물 같은 것을 감추어 두었다가 중생이 필요 할 때 내주는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자리다. 그럼 중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봐주는 것이 당연한 건데, 왜 산신한테 빌어야 되나?
우리가 산신한테 욕먹을 짓을 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살면 거기에 빌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산신의 의무이기 때문에 나는 삭신불공을 드리지 않는다.
또 신장(神將)불공도 드린 적이 없다. 부처님 앞에 가서 경배하고 “부처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했으면 그것으로 된 거지, 우리가 이미 부처님을 믿는 불자(佛子)인데 어떻게 신장들이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겠는가?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앉아서 ‘얼마나 난행고생(難行苦行)을 하셨으면 저희들이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까?’하고 합장향불(合掌向佛)하지, 가서 복달라고 빌고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설산(雪山)에서 수도하시면서 보탑을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지금까지도 그 보탑에서 다 꺼내 쓰도록 해주고 계신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거기다가 돈을 놓고서 복을 달라고 빌고 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따라 행하면 언제든 여시아문(如是我聞) 속에서 그대로 찾아 쓰게 돼 있다. 그러니 어리석은 믿음은 갖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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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전체가 보시(布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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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앞에 돈 갖다 놓은 것을 보시(布施)라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전체가 보시로 되어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전부 남이 쓰게 돼 있고, 또 내가 노력한 것은 결국 남을 도와주게 돼 있다. 그래서 서로 보시한다.
내 몸과 마음이 보시가 될 때 모든 부처님이 같이 하는 것인데, 나는 보시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뭘 얻으려고만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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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것과 가장 어려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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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또 무엇 인가?
말하는 것이 가장 쉽고, 행(行)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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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는 자기 모습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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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떤 큰스님이 동자를 데리고 다녔는데, 동자가 남들이 자기 욕을 하는 소리를 듣고 와서 푸념을 하였다. 그러면서 왜 자기가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느냐고 큰스님께 따져 물었다. 그때 그 큰 스님이 뭐라고 했나?
“거울을 보면 네 얼굴만 보이지 다른 사람 얼굴은 안 보인다. 그럼 네 얼굴만 가지고 얘기할 수 있지 안 보이는 남의 얼굴 가지고는 얘기를 못하지 않느냐? 그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욕한 것은, 바로 저희들 행동이 그렇기 때문에 그 모습만 보인 것이다.너도 거울을 보면 네가 한 모습이 다 보일것 아니냐? 그러나 남의 행동은 안 보이지 않더냐?”
그 한마디에 동자가 항마를 하고 큰스님이 됐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쳐보듯, 남을 얘기할 때도 실은 자기 모습을 가지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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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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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져서 흙탕물이 내려가면 맑은 물은 안 보인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면 흙탕물이 가라앉아서 이윽고 맑은 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내가 속 썩을 일이 많다 하더라도 참고 기다리면 결국은 맑아지는 것이다.
선(善)이 이기지 악(惡)이 이기는 법은 없다. 아무리 악이 득세를 해도 결국은 선이 이긴다. 한번 흙탕물이 생겼다고 해서 그게 끝까지 흙탕물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흙이 가라앉아서 맑은 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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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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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에서 보면 안락행(安樂行)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즉 남이 즐거움을 느낄 때 내가 편안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상대성 원리라는 것이 있다. 하늘의 해와 달도 늘 서로 마찰을 하고 있다. 그 둘의 힘이 음양(陰陽)으로 서로 싸우는 것을 별이 토막토막 끊어서 인간의 호흡에 넣어준다. 그래서 그것을 호흡하고 사는 우리 인간 역시 서로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싸우면서 살아간다.
내외간이든 친구간이든 늘 그렇게 자기만 옳다고 하는데,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남을 즐겁게 해주고 나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나?
그 길은 져주는 것밖에 없다. 내가 져주면 상대방은 이겼다는 쾌감에 즐거움을 느 낀다. 내외간에도 자기가 이겼다고 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내가 져주는 것이 상대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편안해진다. 그러나 결국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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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어리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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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품(觀世音品)에서 보면 “만일 어리석은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게 되느니라”하는 말씀이 나온다.
우치(愚癡), 어리석은 우(愚) 자(字)와 어리석을 치(癡) 자(字)다. 사람마다 두 가지 어리석은 모습으로 산다는 말인데, 뭐뭐 두 가지인가?
우(愚), 첫 번째 어리석은 것은 우리가 뭘 보고도 그 속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눈에 띄어서 보긴 봤는데, 그 속을 모르니까 어리석다고 한다. 자식이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보고 얼굴도 다 봤는데, 부모는 그 자식이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어리석다.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어떻게 될 것을 모르고 있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일도 마찬가지다. 일이 잘될 때는 다 보인다. 환하게 보여서 잘 해나갈 수 있다.그러나 그게 안 보일 때는 일이 안 되는 것이다. 그게 첫 번째 어리석은 모습이다.
두 번째 어리석음 치(癡)는 뭐냐? 자기가 해 놓은 것도 없이 바라는 것이 어리석다.무슨 일을 제대로 해놓지도 않고 '되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노력해서 뭘 만들어 놓지도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자기가 해놓고서 기다려야지, 할 것은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니까 어리석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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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다 손을 대고 절을 하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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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할 때는 무릎을 꿇고 땅에다 손을 대고 절을 한다. 절이란 숭배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 분이 걸어오신 그 모습의 힘을 내가 받기 위해서 두 손을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이다.
그 분이 땅을 걸어오면서 이때까지 모든 사람에게 올바로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절을 올리는데, 땅에 두 손을 대고 무릎을 꿇는 이유는 ‘이 세상 살아오시면서 받으신 그 지기(地氣)의 힘을 당신의 수분을 통해서 저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도 당신의 뜻과 같이 이 세상을 살게 해주십시오'하는 염원인 것이다.
손바닥을 한번 보아라. 땅 밑을 파보면 거기에는 금이 나 있고, 우리 손바닥을 봐도 똑같이 금이 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두 손을 땅에다 대면서 절을 하는 것은, 그 분이 열심히 움직이며 사는 동안 땅의 힘을 얻으신 그 자리에 내가 절을 하는 것이다. ‘당신께서 얻으신 그 힘을 호흡을 통해서 저에게도 주십시오. 그럼 저도 그 땅의 힘을 통해서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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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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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이 맑게 살아야 된다고 하면 자기 혼자 깨끗하고 맑은 것을 얘기하는 줄 안다. 그런데 사실 맑게 산다는 것은 바로 남의 더러운 흙탕물을 깨끗하고 맑게 만들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아무리 자기한테 흙탕물을 튕겨도 오히려 그것을 맑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 맑게 사는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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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세 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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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모습은 세 번 바뀐다. 처음에는 시냇물, 강물에서 사람들이 마시고 갖다 쓸 수 있게 해주고, 그 다음에는 바다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내주고, 마지막으로 다시 구름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변화돼서 또 비로 내려온다. 이것이 수변삼귀(水變三歸)의 모습니다.
여러분들이 걸레질을 하면서, 풀을 뽑으면서 그런 화두를 잡고 생활을 하면 그릇을 닦으면서도 진리 속이요, 길을 걸으면서도 진리 속인 것이다. 움직이는 모든 곳 마다 진리가 들어간다.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행하기는 어렵지만, 그 속에만 들가면 탐진치는 스스로 묶여진다.
우리가 물과 같은 모습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첫째는 여러 사람들이 와서 마음대로 써도 물은 말이 없듯이 그렇게 다 받아주고 따라줘야 되고, 두번째로는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남이 알아듣고 즐거울 수 있도록 해줘야 된다. 그것이 바닷물의 짠맛과 같은 모습이다. 세 번째는 물이 바다에서 올라서 구름이 되어 덮듯이 우리도 남의 허물을 다 덮어줄 줄 알아야 된다. 땅에 씨앗을 넣어도 흙으로 덮어놔야 싹이 튼다. 구름이 덮고 비가 내려서 많은 것을 살려주는 것 모양으로, 모든 사람의 부족한 모습을 다 덮어주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불법(佛法)의 핵심 원리다. 하늘에 뜬 구름을 보면서도 ‘그렇다, 구름은 저렇게 만물을 덮어주는데, 왜 나는 남의 잘못을 덮어주지 못하나?‘하고 참회하면서 살 때 물의 모습 하나만 가지고 화두(話頭)를 잡고 들어가도 충분히 모든 중생의 벗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큰 보시(布施)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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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사람이 전생에 내 어머니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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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을 왔다갔다하는 동안에, 어떤 사람이 전생에 내 딸이었고 어머니 였고 또 형제였는지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미워하고 있는 저 사람이 만약 전생에 나의 어머니였다면, 나를 사랑으로 기르고 보살펴 준 이를 미워하는 업보가 그 얼마나 클 것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점처럼 왔다가면서 어느 때는 친구로, 어느 때는 형제로, 또 어느 때는 부모 자식간으로 그렇게 함께 오고 갔는데, 어느 누구인들 밉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전생에 내 아버지가 돼서 피땀을 흘리면 길러준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난 것이라면, 어떻게 그 상대를 미워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다만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도리이고 불자(佛子)의 근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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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하는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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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살면서 남을 살살 기도록 만들었다면, 나중에는 자기가 벌레가 되어 꾸불거리고 가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벌레는 움직일 때마다 땅에 몸을 대고 기어서 다닌다. 그럴 때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겠는가? 그냥 쭉 가면 좋은데 꾸불텅 꾸불텅 움직이는 데서부터 땅의 지기(地氣)를 받게 된다. 또 자기보다 큰 것한테 잡아먹혀서 몸을 보시한다.
그렇게 고생한 힘들이 변화되면서 별로 올라갈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다시 사람으로 나올 수 있다. 사람으로 나와서는 벌레로 있을 때 하도 고통을 많이 당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런 잘못은 안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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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비(慈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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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엇이고 자비(慈悲)는 무엇인가? 사랑이란 것은 자기가 주고 싶은데 없어서 못 주기 때문에 가슴 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는, 나한테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받지 못해서 못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쌍해서 슬퍼하는 것이 바로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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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말과 죽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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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사람 노릇을 못하고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고, 바로 알고 바로 행하면 그것은 산 것이다.
한마디 말을 해도 남이 알아듣고 이해해서 따르게 된다면 그 말은 산 말이지만, 말을 열 마디, 백 마디 했어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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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타는 겁화(劫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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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화(劫火)가 무엇인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을 태우는 겁화도 있지만 지금 현재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겁화에 탈 수 있다. 겁화가 일어나면 속에서 불이 막 치밀고 올라와서 소리를 질러도 시원치 않고, 어떤 사람은 혼자 데굴데굴 구르고 울고불고 한다.
그런데 겁화 중에서도 자식 때문에 타는 겁화가 제일 무섭다. 배우자하고는 서로 등을 돌릴 수 있지만, 자식은 살아도 내 자식이고 죽어도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식으로 인해서 속이 탈 때는 얼마나 괴로운가?
그럴 때 사람들은 ‘내가 뭘 잘못했나?’ ‘혹시 조상 산소가 잘못됐나?’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마음에서 겁화가 타게 된 원인은 자기 자신이 여러 사람과 화합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이 힘들 때 더 힘들게 만들고, 남이 괴로울 때 더 못되게 굴어서 고통을 주고 살았다면, 그 자식이나 누구를 통해서 반드시 겁화가 들어오게 돼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잘못 살아온 그 모습을 진정으로 참회하라. 참회하고 믿음으로 돌아가면 겁화는 물러간다.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다‘ ‘안됐다‘ 이런 생각만 마음에서 들어가도 그 겁화는 스스로 꺼지게 마련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면 탈수록 점점 더 크게 원망을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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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三界)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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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컴퓨터처럼 전부 이 우주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원망을 너무 많이 하면 그것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에서 다시 땅에 변화를 준다. 그럼 국운(國運)이 어려워지는 문제도 생길 수가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온다. 인간과 하늘과 땅에 그런 삼계(三界)의 원리가 있다.
그러나 땅은 조용히 말을 안 하고 있다. 다만 사람이 살면서 원망이 잦아질 때 그것이 하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다시 땅에 변화를 주면서 천운(天運)이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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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三拜)받은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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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못다 갚은 빚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중생들에게 삼배를 받은 빚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삼배를 할 때 분명히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절을 했다면 그것은 나의 빛이 아니다. 그러니 큰스님이 어떻다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 와서 삼배를 할 때, 만약 내가 그분의 일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빚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삼배 받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지만, 그 빚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돈은 임자 없이 막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러나 삼배는 대단하다. 만약 내가 삼배를 받고 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돌아봐주지 못했을 때 그 빚은 내 생에라도 갚아야 된다. 삼배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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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화를 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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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한테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화를 냈다면, 그것은 나한테 잘못이 있는 것이다. 뭔가는 마(魔)와 병행이 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만약에 대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화를 내면 ‘아, 내가 마(魔)한테 잡혔구나.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해야 된다. 그것을 못하면 백 번 천 번 경(經)을 읽고 절하고 엎드려도 관세음(觀世音)의 가피를 입기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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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이 아니라 고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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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 성불 하지 마라. 어떻게 하면 고생을 더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소는 자기의 살, 뼈, 가죽까지 다 바치는데, 우리 인간은 무엇을 내주나? 죽으면 썩어서 냄새나고 갖다 버리기 바쁜 육신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열심히 고생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시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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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로 하는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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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문을 세 가지로 했다. 하나는 글자를 읽어서 거리에 대한 새김으로 얘기해주고, 또 하나는 그 글자의 뜻을 가지고서 우주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세 번 째로는 글자의 모양을 보고 ‘아. 이런 거로구나'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기복(祈福), 부처님한테 빌어서 복을 달라는 것은 하지 않았다. 왜 안하나? 원래 부처님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 속에서 힘이 나와서 자기 할 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이 워낙 기복으로 들어오다 보니, 그 기복을 통해서 차츰차츰 힘을 길러나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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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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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나를 미워할 때는 왜 그런가?
남이 시기하는 것은, 자기보다 뭔가 낫다는 생각이 드니까 시기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가 한 자리 내려앉으면 그 시기가 안들어온다. 그 사람이 오히려 나를 불쌍하게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낸다.
남이 나를 미워하고 시기할 때는 내가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는 것인 데, 그럴수록 내가 그 사람보다 내려앉고 겸손해지면 자연 마음이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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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기를 마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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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 같아도, 어떤 마음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서 그 마시는 공기가 달라진다.
마음을 편안히 갖고 서로 우애할 때는 좋은 공기가 코에 들어가는데, 서로 분란을 일으키고 싸움을 하게 되면 들어가는 공기가 변화된다. 똑같은 공기지만 마시면서 변화가 된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쉬는 숨과 숨이 차서 쉬는 숨, 또 화가 나서 쉬는 숨이 다 다르다. 화가 날 때 들어오는 공기, 또 힘들 때 들어오는 공기가 다른다. 힘들어서 들어오는 공기나 욕심에서 들어오는 공기는 숨쉴 때마다 자기 몸에 병의 장애를 불러들인다.
그래서 경(經)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도 음타독약(飮他毒藥)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럴 때 마시는 공기는 독약이라는 얘기다. 그 독약을 먹으니까 독약에 미친 증세가 생긴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것들도 독약에 미치는 모습이다.
여러분들은 독약에 미치지 말고 마시지 마라. 화를 내면 자연적으로 그 독약이 들어가서 발광을 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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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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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중에 없을 때라도 여러분들이 '부처님, 제가 이 사람한테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지금 이 사람이 이렇게 힘이 드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면 부처님하고 다 연결이된다.
여러분한테 내가 경(經)을 설해서 부처님 말씀을 전했으면, 나한테도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은 다음에라도 언제든지 여러분 곁에 함께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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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묵은 산삼과 어린 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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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도(道)를 닦을 때 스승님하고 둘이 있으면, 스승님은 내가 단 하루도 그냥 앉아 있는 꼴을 못 보셨다. 낮에는 꼭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게 하셨고, 하다못해 삼밭이라도 매게 하셨다.
우리가 늘 가서 보는 삼밭이 있었는데 거기는 여간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눈이 펑펑 와도 거기는 꼭 살피고 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도 스승님이 가보라고 해서 삼밭을 둘러보고 왔다
“갔다왔나?”
“가봤습니다.”
“봤나?”
“예, 봤습니다.”
“어떤가?”
“뭐 그대로지요. 누가 캐 가지도 않고 잘 있는데 무엇 하러 자꾸 가라고 하십니까?”
“이런 미친놈! 또 가봐.”
세 번만 군소리했다가는 "이 자식, 이거 정신이 빠졌구나!”하고 지팡이로 때리시 니까 그럼 또 올라가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돌아오면 또 가보라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산을 열 다섯 번이다 오르내렸다.
하도 그러시니까 도대체 뭘 보라는 말씀이신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까, 눈이 오고 날이 추운데도 삼이 나온 근처에는 눈이 하나도 없이 다 녹아 있었다. 바로 그것을 보고 오라는 뜻이였다.
그런 것 같으면 “거기 가서 산삼을 보거든 내린 눈이 녹아 있는 게 보일 테니 그것이 어떤 힘인가 봐라“ 이러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런데 이 양반이 그런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산삼 밭에 갔다와"하시니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갔다한 것이다. 내가 만약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쳤으면 아마 다 도망갔을 것이다.
몇 번 다니다 보니 삼 주의에 눈 녹은 모습이 보여서 스승님께 말씀을 드렸다.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뭐냐?”
“눈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래, 눈이 어떻게 녹았든.”
“……”
그냥 눈이 녹은 것만 보고 왔지, 어떻게 녹았는지 그것까지 내가 어찌 알았겠나?
“다시 가봐라.”
그래서 가고 또 가고 몇 번 가다 보니까 눈이 녹은 둘레가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오래 묵은 산삼은 눈 녹은 자국이 가깝고, 바로 난 산삼은 멀리 있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오래 묵은 산삼 주변의 눈이 많이 녹았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오랜 산삼일수록 누이 조금만 녹지 멀리까지 녹지 않는다.
그것을 사람으로 말하면 젊은 사람은 패기가 있어 매사를 마구 하지만 어른은 지혜롭게 한다. 오래 묵은 삼과 어린 삼의 변화를 다 들여다보고 나서 그것을 스승님 께 말씀드리니 그때서야 “맞아"하셨다.
뭘 볼 때는, 풀 하나를 보더라도 깊이 봐라, 이게 몇 년 생일까? 무엇에, 어떻게 필요한 것일까? 깊이 보면 거기서 답이 나온다. 눈밭의 산삼을 보더라도, 그 주변의 눈이 조금 녹아들어 간 것은 정말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오래 된 산삼이지만. 주변의 눈이 많이 녹았다고 해서 ‘야, 이거 대단하다'하고 캐봐라. 그것은 크기도 작고 힘도 대단하지 못하다. 이런 것이 다 진리다.
우리가 선(禪)을 해도 뚫어질 때까지 일심으로 해서 들어갈 때 그게 이루거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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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는 두 주먹을 쥐고 오고,갈 때는 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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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올 때는 두 주먹을 쥐고 오고, 갈 때는 펴고 간다. 그런데 한 주먹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고 또 한 주먹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한 주먹에 쥐고 있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이다. 그 일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쥐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주먹에는 희망을 쥐고 있다. 희망이 아니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때문이다. 그래서 일도 희망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두 주먹을 꼭 쥐고 온다. 바로 그것에 매달려서 우리 인간이 평생을 고행하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밥을 얻어먹는 거지에게도 특기가 있다. 이웃집의 제삿날이나 잔칫날을 수첩에다 적어 놓는다. 그래야 밥을 얻어먹는다. 이 세상 만물이 다 각자의 특기를 살리면서 사는 것이다. 작은 풀은 작은 풀대로, 큰 풀은 클 풀대로 자기 할 일을 하며 산다.
그러면 갈 때는 왜 두 주먹을 펴고 가나? 두 손을 펴는 것은 바로 시방(十方)으로 가겠다는 뜻이다. 일할 것 다하고 희망도 다 바랐으니 이제 시방으로 가겠다 하고 열 손가락을 편다. 이 세상 떠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가는 사람은 없다. 할 일 다 마쳤으니까 마음 편하게 시방으로 간다 해서 손을 다 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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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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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이 도둑질을 할 때는 주인이 모를 거라 생각하고 도둑질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세 가지 세계에 기록이 된다.
첫째는 인간 세계에 기록이 되고, 둘째는 땅의 세계에 기록된다. 그리고 셋째는 하늘의 세계에 기록된다. 그래서 삼계(三界)에 전부 다 기록이 된다.
내 마음은 땅에 속해 있고, 여러 사람의 마음은 인간에 속해 있으며, 하늘의 마음은 또 자연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부처님이 어디 있어?’ 생각했으면, 그 마음은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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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모습을 닮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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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늘 움직이면서 노력하는 것은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과 같이 하기 위해서이다.
이 우주는 365도 3부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도 매일 움직이면서 노력해야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우주와 같아진다.
어린 아기들을 보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다, 젖 먹고 나서는 엎드리고 또 돌아 눕고, 엎어놓으면 또 기어다니고, 좀 더 자라면 일어나서 걷고 또 뛰어다닌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가 늘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닮은 것이다 우리가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움직이면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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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컨대 이 공덕(功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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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에 “원컨대 이 공덕으로 모든 중생에게 미치어 우리들 다 함께 성불해지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이 공덕"이란 무슨 공덕을 말하는가? 일을 한 공덕도 아니요. 돈으로 보시를 한 공덕도 아니요. 남을 도와준 공덕도 아니다. 다만 내가 참회한 공덕을 얘기한다.
그런데 나는 참회를 해서 큰 복을 얻어서 좋다고 하지만. 나 혼자 참회해서 천지만물을 얻게 된다 한들 나 혼자만 얻어서 뭘 하나? 그래서 나와 같이 고생한 사람들도 다 똑같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다시 또 참회하는 것이다.
영가도 참회를 할 때 그 공덕의 힘을 타고 바른 눈을 뜨고, 이 세상에 나와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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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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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축(地軸)이 365도 3부인데, 지금은 그 365도 3부각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다.그래서 빙산이 녹아서 바닷물이 넘치는 문제도 나온다. 지축의 변화는 금방 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죽 내려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온 모습니다.
365도 3부가 줄어들 때 우리 호흡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공기의 입자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나?
100년 전에 사람들이 호흡할 때 들어가던 입자와 지금 들어가는 입자를 보면 다. 르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입자가 닳아서 가벼워졌다. 호흡할 때 들어오는 입자에 따라서 우리가 머리를 달리 쓰게 되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는 모든 물질문명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옛날에 만든 것들은 견고해서 몇 천 년이 지나도 내려가지만 지금 만든 것이 그렇지가 않다.
공기의 입자가 오래 돼서 닳아지고 가벼워졌기 때문에 이 우주에도 변화가 오고, 사람 마음에도, 물질에도 모두 변화가 오고 있다. 사람의 수명도 그 전에 비해 얼마가 더 길어진다 하는 문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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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 아니라 자비(慈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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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에는, 우리 부처님에게는 판단이 없다, 오로지 자비(慈悲)밖에 없는 것이다. 판단은 선악(善惡)을 가지고 있지만 자비는 선(善)도 악(惡)도 다 없다. 무(無)다.
모든 것은 내 탓이지 남의 탓이 아니다.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버리고 전부 내 탓으로 돌리면서 노력하고 들어가서 찾아보아라. 옳고 그른 것을 마음에서 다 없애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에게 힘이 나오면서 눈이 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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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바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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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받은 공덕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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